카드 1. 독자와 질문
이 글은 한 회사에서 20년 가까이 일했고 퇴직연금 확정급여형(DB형)에 가입해 있는 50대 초반 직장인을 독자로 정합니다. 회사가 임금피크제 도입을 예고했고, 독자는 확정기여형(DC형)으로 바꿀지 결정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나온 글은 대부분 \"DB형은 회사가, DC형은 근로자가 운용 위험을 부담합니다\"라는 고정된 구분에서 끝났습니다. 이 독자에게 필요한 답은 그 구분이 아닙니다. 독자가 알아야 할 것은 전환하는 순간 어떤 위험이 근로자에게 넘어오고, 어떤 위험은 오히려 사라지는지입니다.
그래서 이 글은 위험을 운용 위험 하나로 보지 않고 임금 경로 위험, 운용 위험, 적립 부족 위험의 세 장으로 나눠 붙입니다. 이어서 전환 전후로 각 위험을 누가 지는지 맞춰 봅니다. 아래 계산은 구조를 보여 주기 위한 가정 숫자입니다. 실제 금액은 회사의 퇴직연금규약과 본인의 평균임금 산정 결과에 따라 달라집니다.
판단은 두 가지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첫째는 퇴직 직전 3개월의 임금이 지금보다 낮아질 것이 얼마나 확실한가입니다. 둘째는 적립금을 직접 운용하다 생길 수 있는 손실을 남은 근속기간 안에 감당할 수 있는가입니다. 두 질문 가운데 하나라도 답이 분명하지 않다면 전환 여부를 정하기 전에 자료부터 모으는 것이 순서입니다.
카드 2. DB형 가입자도 지는 위험
DB형 퇴직급여는 관련 법령이 정한 기준에 따라 계속근로기간 1년마다 30일분 이상의 평균임금으로 정해집니다. 평균임금은 퇴직 직전 3개월의 임금을 기준으로 산정합니다. 따라서 적립금을 어떻게 굴렸는지는 근로자의 수령액에 영향을 주지 않으며, 운용 손익은 회사가 떠안습니다. 흔히 \"DB형은 회사가 위험을 진다\"고 설명하는 근거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산식 때문에 근로자가 지게 되는 위험도 있습니다. 퇴직 직전 임금이 낮아지면 낮아진 임금이 지나간 근속연수 전체에 곱해집니다. 이 글에서는 이 위험을 임금 경로 위험이라고 부릅니다. 임금이 계속 오르는 동안에는 드러나지 않다가, 임금피크제처럼 말년 임금이 줄어드는 시점에 한꺼번에 나타납니다. 이 위험은 회사가 아니라 근로자가 집니다.
본인이 이 위험에 얼마나 노출되어 있는지는 급여명세서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임금피크제가 적용된 뒤 기본급만 줄어드는지, 정기적으로 받는 수당까지 함께 줄어드는지를 항목별로 살펴봅니다. 평균임금에는 퇴직 직전 3개월 동안 지급된 임금 총액이 반영되므로 줄어드는 항목이 많을수록 감소폭도 커집니다. 적용 기준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면 회사에 서면으로 요청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카드 3. 가정 숫자로 본 전환 시점의 차이
근속 20년 시점의 월 평균임금을 600만원으로 가정합니다. 이후 임금피크제로 월 임금이 420만원으로 줄어든 상태에서 3년을 더 일하고 퇴직한다고 가정합니다. 30일분은 1개월분 임금으로 단순화하고, 운용수익과 세금은 빼고 계산합니다.
- DB형을 유지하는 경우: 420만원 × 23년 = 9,660만원입니다. 앞선 20년도 줄어든 임금으로 다시 계산됩니다.
- 임금피크 직전에 DC형으로 전환하는 경우: 전환 시점에 정산한 600만원 × 20년 = 1억 2,000만원을 DC 계좌로 옮깁니다. 이후 3년 동안은 연간 임금총액의 12분의 1 이상(여기서는 연 420만원으로 가정)이 쌓여 1,260만원이 더해집니다. 합계는 운용 전 기준 1억 3,260만원입니다.
- 차이: 운용수익이 0%라고 가정해도 3,600만원 차이가 납니다. 반대로 DC 계좌의 운용 손실이 이 차이를 넘으면 결과가 뒤집힙니다.
이 계산에서 중요한 것은 금액 자체가 아니라 위험의 교환 구조입니다. 전환하면 과거 20년분에 걸려 있던 임금 경로 위험은 그 시점의 임금으로 고정되어 사라집니다. 대신 이전받은 1억 2,000만원 전체에 대한 운용 위험이 근로자에게 넘어옵니다. 위험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종류가 바뀌는 것입니다.
본인 숫자에 적용할 때는 손익분기점을 먼저 구합니다. 위 가정에서는 이전 금액에서 생긴 운용 손실이 3,600만원을 넘어야 DB형 유지보다 불리해집니다. 이 손실폭이 이전 금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직접 계산해 보고, 그 정도 하락을 견딜 수 있는지 따져 봅니다. 전환 뒤 3년 동안 쌓이는 1,260만원도 운용 대상에 들어가므로, 운용 위험이 걸리는 금액은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난다는 점도 함께 고려합니다.
카드 4. 전환 후 넘어오는 것과 남는 것
전환을 기준으로 세 가지 위험의 주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회사마다 규약이 달라 세부 내용은 다를 수 있으므로 일반 구조로만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 임금 경로 위험: 전환 전에는 근로자가 집니다. 전환 후 과거 근속분에 대해서는 사라지고, 이후 기간은 해마다 그해 임금으로 적립되므로 영향이 작아집니다.
- 운용 위험: 전환 전에는 회사가 집니다. 전환 후에는 이전된 금액과 이후 부담금 전체에 대해 근로자가 지며, 상품 선택과 변경 책임도 함께 넘어옵니다.
- 적립 부족 위험: DB형에서는 회사가 법령이 정한 최소 적립 수준을 맞춰야 하며, 적립금이 지급액보다 적더라도 부족분은 회사의 지급 의무로 남습니다. DC형에서는 부담금이 근로자 명의 계좌에 들어가면 그 금액은 근로자 몫으로 확정됩니다. 다만 회사가 부담금을 제때 넣지 않는 미납 위험은 별도로 남습니다.
- 되돌림 위험: DC형에서 DB형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규약에 따라 제한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환은 사실상 한 방향의 결정으로 보고 판단하는 편이 안전합니다.
운용 위험이 넘어오는 시점은 \"전환 신청일\"이 아니라 적립금이 DC 계좌로 실제 이전되어 운용 상품을 고르는 시점입니다. 이전 직후 원리금보장형에 둘지, 실적배당형을 섞을지에 따라 카드 3의 3,600만원 차이가 유지될 수도 있고 줄어들 수도 있습니다. 퇴직까지 남은 기간이 짧을수록 손실을 회복할 시간도 짧다는 점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전환 뒤 남는 미납 위험은 근로자가 직접 점검할 수 있습니다. DC 계좌의 입금 내역을 정기적으로 조회해 회사 부담금이 규약에 정한 시기에 들어왔는지 확인합니다. 입금이 늦거나 빠진 기록이 보이면 회사 담당 부서와 운용 금융회사에 차례로 문의하고, 문의한 날짜와 답변 내용을 기록해 두는 것이 좋습니다.
카드 5. 전환 전 준비 목록
결정 전에 확인할 항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모두 숫자와 서류로 확인할 수 있는 항목입니다.
- 회사의 퇴직연금규약에 DB형에서 DC형으로 전환하는 절차와 과거 근속기간의 이전 방식이 어떻게 정해져 있는지 확인합니다.
- 임금피크제의 시작 시점, 감액률, 적용 기간을 서면으로 받아 퇴직 직전 3개월 평균임금을 직접 추정합니다.
- 현재 시점 기준 DB형 예상 퇴직급여액을 회사 담당 부서에 요청합니다.
- 본인의 퇴직연금 제도 유형, 적립금, 운용 금융회사를 금융감독원 통합연금포털에서 조회해 회사 자료와 일치하는지 대조합니다.
- DC 계좌에서 고를 수 있는 상품 목록과 수수료 구조를 미리 받아, 이전 직후 바로 운용 지시를 할 수 있게 준비합니다.
- 퇴직 후 생활비 계획에 공적연금이 얼마나 들어오는지 국민연금공단의 예상연금액 조회 서비스로 확인합니다. 퇴직연금 운용에서 감당할 수 있는 위험의 크기는 공적연금으로 확보되는 기본 소득에 따라 달라집니다.
이 항목들은 순서대로 진행하는 것이 효율적입니다. 먼저 규약과 임금피크제 기준을 확인해 전환이 가능한지와 임금 감소폭을 파악합니다. 다음으로 회사가 산정한 예상 퇴직급여액과 포털 조회 결과를 맞춰 출발 금액을 확정합니다. 마지막으로 상품 목록과 공적연금 예상액을 보고 감당할 수 있는 손실폭을 정합니다. 앞 단계의 숫자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상품부터 고르면 비교 기준이 흔들립니다.
이 목록은 판단 재료를 모으는 절차이며, 특정 제도나 상품을 권유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임금이 줄지 않거나 오히려 오르는 경우에는 카드 3의 결과가 반대로 나올 수 있습니다.
연결해서 보면
카드 2와 카드 3을 이어 보면 DB형이 근로자에게 위험이 없는 제도가 아니라는 점이 드러납니다. DB형에서는 임금 경로 위험을 근로자가 지며, 임금피크제는 이 위험이 실제 금액으로 바뀌는 계기가 됩니다. 카드 3과 카드 4를 이어 보면 전환은 임금 경로 위험을 운용 위험으로 바꾸는 거래이고, 그 교환이 일어나는 시점은 적립금이 실제로 이전되는 날입니다.
따라서 전환 결정은 어느 제도가 더 안전한지를 고르는 일이 아니라 어떤 위험을 질지를 고르는 일입니다. 두 위험은 성격이 달라 그대로는 비교하기 어려우므로, 카드 3처럼 둘 다 금액으로 바꿔 같은 단위로 놓아야 결론을 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카드 5는 이 교환이 유리한지 판단하는 데 필요한 두 숫자, 곧 예상 임금 감소폭과 감당할 수 있는 운용 손실폭을 모으는 절차입니다. 임금 감소로 줄어들 금액이 예상 운용 손실보다 크고 남은 근속기간 동안 운용을 관리할 수 있다면 전환을 검토할 근거가 생깁니다. 그 반대라면 DB형을 유지할 근거가 됩니다. 어느 쪽이든 규약과 실제 산정 금액을 확인한 뒤에 결정하는 것이 바른 순서입니다.